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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약자(略字) 제정사


제1차 문교부 약자를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은 牽龜@solgwi 씨의 노고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한다.


대한민국 한자 정책의 개요

1948년

한글전용법 국회 통과

1951년

상용한자 1,000자 발표

1953년

상용한자 1,300자 발표

​1967년 11월

문교부〈한자약자시안〉542자 마련

1967년 12월

신문한자 2,000자 제한 발표

​1967년 12월

문교부〈한자약자 제정안〉215→198자 마련

​1968년

​한글전용 5개년 계획 수립

1970년

초·중·고 교과서에서 한자 삭제

1972년

한문교육용 기초한자 1,800자 발표

1973년

중·고등학교에 한문과 신설

1975년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한자 병기

1981년

한국어문회〈신문용 약자시안〉181자 권고

1983년 4월

조선일보 신문약자 90자 적용

1993년 4월

조선일보 신문약자 적용 중단

문교부 〈한자약자시안〉 542자 (1967년 11월)

문교부 소속 국어심의회 한문분과위원회(당시 위원장: 조용욱)는 1967년 11월 10일에 문교부 제정 상용한자 1,300자 가운데 542자의 약자 시안略字試案을 마련해 국어심의회에 제출했다. 이 안은 〈한자약자시안〉(한문약자시안이라고도)이라는 명칭으로 보도되었으나, 편의상 〈문교부 약자〉라고 칭하겠다. 동년 11월 20일자 《연세춘추》의 논평에 따르면, 이 가운데 일본식 신자체와 동일한 것이 57자, 중공식 간화자와 동일한 것이 33자, 양식을 절충해 제정한 것이 43자다. 일부 사소한 자형 차이를 무시한다면 중일 양국의 표준 자형과 일치하는 〈문교부 약자〉의 수는 더 많아질 것이다. 이는 필연적인 현상으로, 한자문화권에서는 중국에서 발생해 주변국으로 확산된 국제國際 속자가, 국지적으로 발생한 국별國別 속자보다 더 보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교부 약자〉의 제정이 어떠한 연유로 착수된 작업인가 하는 것은, 문교부 자체가 이미 통폐합되어 사라진 정부 부처이기도 하고, 또 워낙에 오래된 일이기 때문에 관련 일차 자료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은 탓에 추적이 어렵다. 이곳에는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보도된 간접 자료에 의한 바를(주로 조선일보를 기준으로) 기술했다.

한문분과위는 동년 2월 23일(경향신문에서는 2월 27일로 보도)에 약자 제정에 착수했다. 1968학년도 교과서에 우선 적용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였다. 약자 제정 이가원 연세대학교 교수를 포함한 7인(위원장: 조용욱; 위원: 민태식, 이가원, 차상원, 김경탁, 김능근)이 핵심적으로 관여했다. 상용한자(당시 1,300자)에서 획수가 많은 글자를 주로 고치고, 중일의 사례를 참고하면서 정자正字의 형·음·의를 검토해 채택함과 동시에 초서와 행서의 간편한 서법을 채택한다는 원칙하에 9개월만에 총 542자를 선정했다고 한다. 시안 완성 후 열린 국어심의회는 28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일석一石 이희승 박사가 의장, 외솔 최현배 씨가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한자 약자를 검토하는 자리에서 한자 폐지를 주장하는 위원이 포함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동년 동월 11일부터 각자 해당 시안을 심의해 11월 21일 오후 2시에 자별字別 합의를 모아 통과시킬 예정이었다. 그 후에는 언론계와 학회의 인사를 초치해 익년에 확정을 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최현배 부위원장을 포함한 각계의 인사, 민간 신문사는 곧바로 날카롭게 반발했다. ‘한자약자는 한자교육의 이중부담’ ‘무리한 부분은 재검토해야’ ‘국적 없는 약자’등의 제목으로 다양한 비판이 있었다. 한글학회는 착수 초기부터 ‘약자제정이 한글전용법의 입법정신에 어긋난다’며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다. 〈문교부 약자〉는 주로 조선 문집과 방각본에서 흔히 사용된 조선 후기의 약자를 채택한 것이 많았으나, 일제시대를 거치며 이들의 사용은 점차 쇠퇴했기에 당시 지식인들에게는 생소한 것이 많았으며, 초서를 억지로 행서화한 데에서 오는 반감이 있었다. 한국 고유의 속자를 채용한 〈문교부 약자〉는 거센 부정적 여론에 휘말려, 결국 21일에 열린 첫 모임에서 압도적인 반대 의견으로 해당 시안을 철회했다.

동아일보 1967년 11월 11일 석간 7면 발췌

문교부 547자 약자 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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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南廣祐〈漢字 略字 制定의 問題點〉《朝鮮日報》(1967年 11月11日)

  • 〈常用漢字를 略字로〉《京鄕新聞》(1967年 11月11日)

  • 〈『漢文略字試案』 마련〉《東亜日報》(1967年 11月11日)

  • 〈常用漢字를 略字로〉《朝鮮日報》(1967年 11月12日)

  • 〈문교부 제정 한자 약자에 대한 여론〉《연세춘추》(1967年 11月20日)

  • 金熙楨(1976)〈敎育用 基礎漢字의 略字化를 爲한 比較硏究〉碩士学位論文

 

문교부 〈한자 약자 제정안〉 215→198자 (1967년 12월)

542자의 〈한자약자시안〉이 여론의 반대에 백지화되자, 문교부는 서둘러 한문분과위에 위촉해 당시 통용되는 관용 약자 215자를 추려 새 약자 제정안을 마련하고, 동년 12월 21일 국어심의회에 상정했다. 같은 날 오후에 진행된 심의에서 6자의 자체字體를 고치는 한편, 자획이 비교적 적은 17자(氣, 歷, 曆, 面, 無, 密, 收, 樹, 隨, 飛, 時, 際, 祭, 察, 鄕, 響, 惠)는 정자正字로 고치고 198자만을 제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 역시 이가원 연세대학교 교수를 포함한 7인(구성인원이 전과 같은지는 불명)이 민간에서 통용되는 약자만을 수집해 한 달만에 마련한 것이다. 대중성 있는 약자를 위주로 제정한 것이다 보니, 일부 한글전용론자를 제외하면 참석자 21인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찬동해 축자 심의逐字審議를 주장했고, 조율을 거쳐 상기의 수정 사항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심의 도중, 약자 제정에 반대한 6인(동아일보에서는 4인으로 보도)이 돌연 퇴장하는 바람에 성원 미달로 정식으로 채택 여부를 결정짓지 못한 채 산회했다.

1967년 내로 합의를 보아 198자 안을 채택할 계획이었으나 실현되지 못한 듯하다. 그러다가 1968년 3월 30일, 문교부는 박정희 정부의 한글전용화 5개년 계획이 구체화됨에 따라 한자 약자안을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1967년 3월부터 착수해 1년간 진행된 약자 제정의 시도는 끝내 실현되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개정된 198자 안은 당시 대한민국의 현실적인 문자 습관을 반영한 매우 합리적인 결과물이었기 때문에, 이것의 제정이 무산된 것은 몹시 아쉬운 일이다. 한글전용법과 별개로 한자 약자의 제정은 분명 필요한 일이었으며, 2023년 현재에 이르러서도 학술 분야에서 한자는 높은 빈도로 활용되고 있다. 이때 당시 대한민국의 언어·문자 상황을 고려했을 때, 완성도 높은 198자 안이 채택되었다면, (1) 대한민국에서 한자 학습 환경을 개선하고, (2) 신문과 도서의 활자 가독성을 제고하며, (3) 필기체와 인쇄체가 분리된 이원화二元化된 한자 사용 습관을 해소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참고 문헌

  • 〈略字百98字 채택〉《京鄕新聞》(1967年 12月22日)

  • 〈漢字略字 198字〉《朝鮮日報》(1967年 12月22日)

  • 〈漢字略字 198字로 줄여〉《東亜日報》(1967年 12月22日)

 

한국어문회 〈신문용 약자 시안〉 181자 (1981년)

문교부에 의한 약자 제정이 실패로 끝난 이후, 약자 제정을 제창하는 목소리는 잠잠했다. 그러나 1980년, 한국식 약자 제정에 대한 담론은 약자 제정의 긴요성을 증명하듯이 갑작스럽게 부활했다. 한국어문교육연구회(이하, 한국어문회)의 표준 약자 제정의 동태는 신문 지면상에서 한자의 분별을 더 용이케 하자는 데서도, 지면에서는 정자를, 필기에서는 약자를 사용하는 양층화된 문어 습관을 해소하고자 제언된 것이기도 하다.

이전 문교부의 사례와는 대조적으로, 모든 과정이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한국어문회에서 발간한 《어문연구語文硏究》 9권 2호(1981년 10월)에는 이례적으로 약자 제정에 관한 기사가 많으며, 1981년 11월에는 신문사에 181자의 약자 사용을 권고하기에 이른다. 이 모든 일련의 논의의 시발점은 동년 4월 16일자 《조선일보》 학예란에 게재된 서강화 교열부장(당시 한국어문회 이사)의 기사 〈「略字시대」로 가자〉였다. 이는 물론 당시 《조선일보》가 약자 제정을 통한 지면 쇄신에 협조적이었던 까닭에 양자 간의 조율이 원활했던 것도 있었다.

동년 5월 14일, 한국어문회 정기총회에서 위촉된 4인의 소위원(박로춘, 서강화, 성원경, 김두찬)이 약자 문제를 담당했다. 4월 16일자 《조선일보》에 일찍이 서강화 약자 시안이 게재되었는데, 5월 23일 조선일보사 교열부장실에서 열린 제1차 심의에서 해당 시안을 토대로 논의를 발전시켜 나가기로 결정했다. 또 같은 날 심의에서 1967년 11월 문교부 약자의 실패 요인을 분석하고 약자 선정의 방향성을 논의했으며 그 외에도 다양한 의견이 나왔으나, 필자가 주목한 것은 중국과 일본의 선례대로 우선 적은 자수의 약자 안을 내놓고 축차적으로 보완하자는 의견, 중공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중국 간화자簡化字는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의견, 교육용 기초한자(1,800자)를 약자 제정의 기반으로 삼자는 논의 등이다. 5월 31일의 제2차 심의 후 박로춘 위원은 이사회에 기결정旣決定 124자, 미정 37자, 미심사 240자의 〈基礎漢字(1,800字) 略体 試案(발초)〉를 배포했다.

제3차 심의에서는 1,800자의 교육용 기초한자 바탕에서 2,000자의 신문 한자로 기준을 재차 틀게 되었고, 6대 신문(《동아일보》 《매일경제신문》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국경제신문》 《한국일보》)과 텔레비전 방송에서 사용된 약자 활용 실태를 조사했고, 제4차 심의에서는 신문 한자를 중심으로 〈수정 약자 시안〉을 내놓았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제4차 심의에서 나온 〈수정 약자 시안〉

제5차 심의 후 설문을 돌렸고, 그 회신을 참고해 제6차 심의에서 약자의 취사선택을 감행했다. 예시는 활자 사정상 생략한다. 〈신문용 약자〉의 이사회 최종 통과분은 자종字種 89자와 그로부터 파생된 계열자系列字 92자를 합친 총 181자다. 이는 《어문연구》 30호에 공개되었으며, 한국어문회는 언론기관과 인쇄업소에서 해당 약자시안을 사용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모든 작업은 3개월만에 완수됐다.


이사회 통과분 181자

참고 문헌

  • 金斗燦 (1981)〈「新聞用 略字(試案)」 選定의 經過報告〉《語文硏究》 9–2. 韓國語文敎育硏究會

  • 金熙禎 (1981)〈標準 略字体 制定의 必要性―人文系高校 学生·敎師를 對象으로 한 調査〉《語文硏究》 9–2. 韓國語文敎育硏究會

  • 朴魯春 (1981)〈漢字 略字의 私見·私案〉《語文硏究》 9–2. 韓國語文敎育硏究會

  • 〈新聞活字 바꾸기와 略字와의 問題點〉《語文硏究》9–2. 韓國語文敎育硏究會

  • 徐康和〈「略字시대」로 가자〉《朝鮮日報》(1981年 4月16日)

  • 〈漢字略字 試案발표 語文敎育硏 百81字〉《東亞日報》(1981年 11月16日)

  • 韓国校閱記者会(1998)《韓國新聞放送 말글百年史. 上》한국프레스센터

 

《조선일보》 약자 90자 (1983년)

《조선일보》는 한국어문회가 제정한 〈신문용 약자 시안〉의 절반인 90자를 우선 시험적으로 지면에 적용했다. 다만 본래 靈, 鬱의 약자로 제시되었던 灵, 㭗 대신에 霊, 欝를 적용했는데, 지나친 간략화에서 오는 혼란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90자로 이루어진 《조선일보》 약자는 활자 문제로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으며, 1983년 4월부터 1993년 4월까지 10년간 적용되었다. 점차 약자의 수를 늘려가겠다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참고 문헌

  • 〈오늘부터 漢字略字 사용〉《朝鮮日報》(1967年 4月26日)

  • 南廣祐 (1984)〈漢字略字의 국적追跡〉《月刊朝鮮》 1984–1. 朝鮮日報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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