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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이어져오는 전래지명

최종 수정일: 2023년 11월 12일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고유어로 된 지명입니다. 서울은 가장 유명한 한국 도시일 지는 몰라도, 가장 보편적인 방식으로 지어진 한국 지명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주요 지자체 중에서 고유어 지명을 채택하고 있는 곳은 서울특별시가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한국 지명의 절대다수는 중국식으로 작명된 한자 지명입니다.


전래지명이란

하지만 삼국시대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당시에는 고유어로 지어진 지명들이 우세했고, 이들은 『삼국사기』「지리지」 등의 역사문헌에 기록돼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이러한 지명의 전통적인 작명 풍습은 현대까지도 이어져내려오고 있으며, 전래지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전래지명이라고 해서 반드시 고유어 지명인 것은 아닙니다.


한반도 고지명은 고대 한국어 연구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지명은 한자를 활용한 차자 표기로 기록되어 있고, 고대 한국어 시기에 사용되었던 한자를 활용한 자국어 표기 전통이 고려시대의 세력 재편을 거치며 부분적으로 실전(失傳)되었기 때문에, 파편적인 언어의 해독 과정이 으레 그러하듯이, 한반도 고지명을 해석하는 연구는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를 상기시키는, 다대한 노력이 투입되지만 부진한 성과를 내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현대까지 전승된 특정 전래지명이 고대 한국어 시기부터 이어져온 구전 전통이라면, 한반도 고지명 연구에 획기적인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지명의 전래

전래지명에 관심을 가지고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이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펴낸 고지도 연구 자료를 열독하면서, 역사에 기록된 고지명에서 현대까지 이어져내려왔다고 여겨지는 전래지명 사례를 소수나마 발견하였습니다. 이로써 고지명 연구에 전래지명 자료가 실제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다음은 제가 발견한 몇 가지 사례입니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일대

七重縣 一云難隠別 “칠중현은 난은별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권37 잡지 제6

고구려 한산주 칠중현의 이칭은 난은별이고, 훗날 적성군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오늘날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일대입니다. 과거 고대 한국어를 연구하던 학자들은 이 지명에서 칠중현의 七(칠)을 難隱(난은)에 대응시켜, 고구려어에서 수사 “일곱”을 /나는/이라고 발음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를 만주어 ᠨᠠᡩᠠᠨ nadan, 일본어 なな nana와 동원어인 것으로 보아, 고구려어가 만주어 및 일본어와 친연관계에 있다는 주장도 한때는 주류 의견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발견한 전래지명 자료는 다른 해석을 제안합니다.


한글학회의 『한국지명총람』과 국립중앙도서관의 『고지도를 통해 본 경기지명연구』에 따르면, 경기도 파주 적성면과 그 근처에서 「느리목」「늘목」「늘무기」「늘미깃고개」라는 전래지명이 수집된바 있습니다.

  • 『총람』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장현리 「늘미깃고개」

  • 『총람』 경기도 파주군 진서면 늘목리 「느리목」

  • 『고지도』 파주시 적성면 늘목리(乻目里) 「늘목·늘무기」 (168쪽)

전래지명이 흥미로운 이유는, 전부요소인 「늘~느리」와 후부요소인 「목~무기~미기」가 각각 칠중의 七(일곱 칠)과 重(무거울 중)에 대응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적성의 積(쌓을 적)은 『신증유합』(1576년)에서 「누리」라는 고훈(古訓)이 문증되기 때문에, 현대 전래지명과도 부합합니다. 이로써 고구려 한산주에 설치된 칠중현은 현대에 「느리목~늘무기」 등으로 이어진 지명의 고대 한국어 형태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표기한 것이 됩니다. 반면 난은별은 주변 일대을 가리키는 다른 계통의 지명으로 보입니다.


대전광역시 대덕구 남부 일대

比豐郡 本百濟雨述郡 景德王攺名 今懷德郡 領縣二 “비풍군은 본래 백제 우술군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였다. 지금의 회덕군이며 영현은 둘.” 『삼국사기』 권36 잡지 제5

백제의 지명으로 비풍군 또는 우술군으로 알려진 도시는 훗날 고려시대에 회덕군이 되었고, 오늘날 대전광역시 대덕구 남부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비풍」과 「우술」이라는 표기는 상호보완적이기 때문에 흥미로운데, 「비풍」의 比(견줄 비)는 「우술」의 雨(비 우)와 대응하고, 「우술」의 述(펼 술)은 「비풍」의 豊(가멸 풍)에 대응합니다.


「비」는 현대어에도 그대로 쓰이지만, 「술~수리」의 경우 전래지명에서 봉우리를 의미하며, 「봉우리」라는 단어 자체가 「봉」과 「수리」의 합성어입니다. 「정수리」 등의 어휘에도 나타나는 「수리」는 “꼭대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래지명 자료는 「수리」에 “우거지다, 풍성하다”라는 의미 또한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전래지명의 한화(漢化) 사례에서 「수리」에 茂, 豊 등의 글자가 대역된 것으로부터 뒷받침됩니다.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채록 당시 충청남도 대덕군 회덕면 일대에서 「비수리」라는 전래지명이 수집되었는데, 이는 백제 비풍군의 지명이 현대까지 그대로 이어진 결과입니다.

  • 『총람』 충청남도 대덕군 회덕면 「비수리」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의 고개

古寧郡 本古寧加耶國 新羅取之爲古冬攬郡 一云古陵縣 “고령군은 본래 고령가야국으로 신라가 취하여 고동람군으로 하였다. 고릉현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권34 잡지 제3

경상북도 상주시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고령가야는 신라에 복속되어 고동람군이 되었습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채록 당시 경상북도 상주군 공검면 하흘리에 위치한 언덕의 전래지명인 「고드래미재」가 수집되어 실려 있습니다.

  • 『총람』 경상북도 상주군 공검면 하흘리 「고드래미재」

여기서 攬은 축약 표기로 보이는데, 전래지명에서 “산”을 의미하는 「미」의 존재가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합니다. 「고드래미」와 유사한 지명으로는 백제어를 연구한 도수희 교수가 일본에서 백제를 부르는 くだら [구다라]의 어원으로 지목한 전래지명 「구드래나루」, 그리고 『삼국사기』「지리지」에 나오는 경상북도 안동시의 고지명 古陀耶(고타야) 등이 있으며, 한반도 남부 지방에 걸쳐 분포합니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삼국시대에 한반도 남부에서 일반적이었던 지명이, 현대에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전래지명의 학술적 가치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읽어본 전래지명 자료로부터 뜻밖에도 문헌에 기록된 고지명에 비정될 수 있는 사례를 세 개나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전래지명 자료의 철저한 검토를 통해 고지명에 비정 가능한 사례는 더 늘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가 한반도 고지명 연구에 줄 수 있는 통찰은 대단한 것입니다. 고대 한국어와 중세 한국어 사이의 단절된 연결고리 역할을 전래지명이 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백 년, 어쩌면 천 년 이상 이어져온 구전 전통을 오로지 학술적 관점에서만 조명하는 것은 부조리할 수 있습니다. 지역 토착민이 대대로 물려받은 구전 문화유산인 전래지명은 과거 행정 상의 편의를 위해 중국식으로 변모되어 왜곡되어 왔습니다. 주요 지자체가 전래지명에 조명하고 이들을 복원한다면, 전통문화 계승의 풍조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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